제주서 교회 부지 통째로 헌납 "땅도 개발이익도 주님것"

제주서 교회 부지 통째로 헌납 "땅도 개발이익도 주님것"

<로드인터뷰_사람꽃> 제주오라교회 박성철 장로
"어머니의 강인함과 신앙심이 나를 키워"
울타리를 없앤 교회, 지역민들의 사랑방이 되길
오랜 교직생활, 크리스천 교사로서 후회되는 일도 많아
삶과 신앙으로 자녀에게 본이 되고 싶어

제주오라교회 입구에서(왼쪽부터 박성철 장로, 이상성 목사)제주오라교회 입구에서(왼쪽부터 박성철 장로, 이상성 목사) ■ 방송 : CBS 라디오 <로드인터뷰_사람꽃>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 방송일시 : 2023년 5월 20일(토) 오후 5시 30분
■ 대담자 : 제주오라침례교회 박성철 장로

삶이 아름다운 크리스천을 만나는 시간, 로드인터뷰 사람꽃. 오늘은 제주오라침례교회 박성철 장로를 제주CBS 목회자 기자인 제주연동서부교회 이상성 목사가 만나봅니다.
 
◆이상성> 오라침례교회를 간단하게 소개해주시죠?
 
◇박성철> 오라교회는 1968년에 처음 오라동에 세워졌는데, 그 후 1972년에는 과거에 있던 부지를 마련하고 그곳에 20평의 규모로 교회를 지었습니다.
 
1994년에는 제2대 김태환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를 건축했는데, 그때는 그쪽의 부지가 자연녹지 지역이라 크게 지을 수가 없어서 40평짜리 2층으로 건축을 했는데요. 전 그때부터 건물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한번 더 교회를 지어야겠다는 마음을 드렸어요.
 
◆이상성>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현대식으로 아름답고 멋지게 지어졌는데요. 사실 이 성전 건축을 위해 장로님이 부지를 헌납한 걸로 압니다.
 
◇박성철> 우리 크리스천이라면 다 청지기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가 잠시 이 세상에 살 동안에 그것을 우리가 관리하고 빌려 쓰고 있는데, 하나님이 필요하시다고 하면, 주인이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부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그리고 또 가지고 있는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이상성> 오라동이 최근에 많이 개발되고, 또 지금 와 보니까 성전 부지가 길가에 바로 붙어 있어서 매각을 했다면 상당한 이익이 있었을 텐데, 그것을 기꺼이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내놓는다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 같거든요.
 
◇박성철> 다들 그렇게 얘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할 때 그 어린 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에서 기적을 이루어내지 않았습니까. 또 예루살렘 입성할 때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주인이 또 주께서 쓰겠다고 하라 하니까 드렸던 것과 똑같은 거죠.
 
◆이상성> 청지기의 삶과 마음이 없으면 참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이 너무 알려지는게 싫다고 인터뷰를 거절하기도 했는데,  만나보니까 실제로 너무 겸손하시네요. 부모님 얘기를 좀 듣고 싶어요. 장로님 어머님이 참 대단한 신앙을 가진 분이고, 그 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박성철> 저희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신앙을 갖게 되면서 신앙생활은 상당히 철저하게 했어요. 새벽 기도를 거의 빼지 않고 나갔고 아주 강직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제 누이동생은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입니다. 근데 저희 남매를 어머니 혼자 힘으로 키워냈고 배우지 못한 한 때문에 저희들을 대학까지 다 보냈어요.
 
먼 산에서 새벽에 나무 땔감을 지고 와서 장에 내다 팔고, 여기서 모슬포까지 돈을 아끼기 위해 걸어 다녔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헌신한 대단한 분이었다고 제가 자랑스럽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상성> 두 남매 키우는 게 쉽지 않았는데, 두 분 다 대학까지 보내고 또 두 남매를 모두 교육자로 키워냈다고 들었어요.
 
◇박성철> 저희들을 신앙으로 잘 키워내셨고 또 그 어려운 가운데도 연세가 많을 때 돌아가셨죠. 2020년, 우리 나이로 99세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때까지도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고 마지막에는 좀 거동이 불편해서 잘 나가지 못했지만 거동할 수 있을 때는 꾸준히 나갔습니다. 못 나갈 때는 방송으로 들었죠.
 
◆이상성> 어머니는 오라침례교회의 산증인이자 역사의 궤를 같이 했던 분이시네요.
 
◇박성철> 그렇죠. 1968년 10월에 교회가 개척 됐는데, 저는 1969년 초부터 교회를 나갔고 어머니-는 한두 해 정도 늦게 나왔지만 어머니가 더 열심히 다녔습니다. 동생도 함께 교회를 다녀서 이 교회에서 모두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상성> 아버지가 네 살 때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제주4.3과 관련해서도 이 가정에 아픔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948년 5월 1일에 있었던 오라동 방화사건과 연관이 있다구요?
 
◇박성철> 그 당시에 집이 다 불타버려서 연미마을에 살다가 사평쪽으로 가서 임시 집을 구해 거주하게 됐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또 가족들이 학살당하고 병으로 돌아가시고 해서 집안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도 그때 상심했을 것이고요. 저는 그때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모두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상성> 경품으로 받은 자동차를 본인이 쓰지 않고 담임목사 가족에게 선물했다구요?
 
◇박성철> 이건 아무도 모르는 얘기인데, 그때가 2015년이었습니다. '오현인의 날' 행사를 주일에 하는데, 그날이 마침 교회 사모님의 생일이었습니다. 
 
당시에 티코를 타고 다녔는데 고장이 자주 나 공업사 가는 날이 더 많았죠. 그래서 그날 아침에 잠깐 기도를 했는데, '오늘 만약 경품에 당첨이 되면 사모님 생일 선물로 드리라는 걸로 알고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기도를 했어요. 근데 정말 그렇게 된 거예요.

기도를 해 놓고 실천 안 할 수 없잖아요. 누가 뭐라고 하든 하나님이 그렇게 되게 해주셨으니까 '아, 이건 하나님이 나에게 주는 게 아니라 우리 사모님에게 선물로 주시는 거다' 생각하고 드렸습니다. 지금도 타고 다닙니다.
헌당예배 후 전교인 기념촬영. 박성철 장로 제공. 헌당예배 후 전교인 기념촬영. 박성철 장로 제공. ◆이상성> 장로님은 퇴직하시기 전에 오현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는데, 평생 아이들을 가르쳤던 그 시절은 어땠나요?
 
◇박성철> 지금 돌아보면 잘한 것보다 잘못했던 것들만 생각납니다.
 
당시에는 잘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고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과연 크리스천 교사로서 본받을만했었나 생각하면 너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저는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를 하도록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지만 그게 또 마음과 뜻대로 잘 안 되는 부분들이 좀 있었죠.
 
그래서 지금도 많이 후회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이 방송을 통해서 제가 하나님 앞에 사죄하고 당시 학생들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될 부분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 한 가지만 얘기를 한다면 1994년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2학년 4반을 담임했는데, 저는 그때 아이들에게 '잘못은 할 수 있는데 잘못을 했을 때 그걸 반성하면 용서해 주겠다' 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우린 수업시간에  몇 시간마다 출석 체크를 하는데, 한 아이가 중간 체육시간에 출석 체크가 돼 있어서 제가 그 학생을 불러서 물어봤죠. 그 시간에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그 시간에 제가 다른 수업을 하면서 교실 앞을 지나가다가 그 학생하고 눈이 마주쳤었어요.

체육은 보통 운동장에서 하는데 교실에 남아있어서, 전 수업시간에 안 갔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너 수업 빠진 게 맞잖아. 나하고 눈이 마주쳤잖아' 그러면서 제가 다그쳤죠. 근데 그 학생은 그게 아니라고 자꾸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체벌을 좀 했었는데, 그게 제 착각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어요. 그 다음 주쯤에 같은 시간에 교실 앞을 지나가면서 생각해 보니까 제가 착각을 한 거예요.

그 전날 거 하고 그날을 착각해서 학생을 꾸짖고 체벌도 했는데, 지금도 생각해보면 제가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 후에 제가 그걸 깨달았을 때 그 학생에게 빨리 용기를 내서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못 한 게 지금도 상당히 후회가 돼요.
 
'그 아이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했구나. 그런 것 때문에 아이가 인생에 많은 타격을 입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도 너무나 미안합니다.
 
1994년의 일이니까 지금은 40대 후반정도 됐겠죠. 어디선가 이 얘길 듣는다면 제가 너무나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싶습니다.
 
◆이상성> 지금 은퇴하고 여러 활동을 많이 하겠지만 홀리클럽이라는 성경공부 그룹에도 꾸준히 참석한다구요.
 
◇박성철> 여기에 친구 장로가 있어요. 그 친구가 자꾸 여기 들어와서 같이 활동도 하고 성경 공부도 하자고 했는데, 재직 중에는 출근을 좀 일찍 해야 했어요. 그래서 하지 못하다가 퇴직한 후에 같이 활동을 하게 됐죠.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우리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성경 공부 자료를 준비하면서 했는데, 지금은 지도 목사가 있어서 성경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주고 또 우리가 같이 성경 공부를 한 후에는 말씀에 대해서 서로 나눔도 하고 나라와 민족, 제주도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 또한 지금 목회를 하고 있는 그 자녀들을 위해서 같이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신앙생활에 많은 도전도 받고 우리 교회는 장로가 저 혼자인데, 다른 장로들하고 교제를 하면서 그들의 좋은 점, 훌륭한 점들을 많이 배우고 본받고 있습니다.
 
◆이상성> 장로님은 자녀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자녀들 얘기를 좀 해주세요.
 
◇박성철> 아들이 둘이 있는데, 지금 큰아들은 신앙생활을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신앙적으로 키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신앙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정한 교회가 없어서 우리 오라교회 줌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은 두 아들과 손자 손녀가 참 좋은 신앙을 가지고 세상의 경쟁에 휘둘리기보다 신앙 안에서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고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하는 건 그렇고 삶으로써 아이들에게 좋은 신앙의 모범을 보이려고 하는데 그게 좀 쉽지가 않네요.

교회는 안 다니지만 헌당예배를  축하하러 온 초등학교 동창생들, 함께 기념식수를 한 후. 박성철 장로 제공교회는 안 다니지만 헌당예배를 축하하러 온 초등학교 동창생들, 함께 기념식수를 한 후. 박성철 장로 제공 
◆이상성> 장로님의 마음이 이 방송을 통해서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자녀들이 모두 훌륭하게 자라서 사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도 제목 함께 나눠주실까요.
 
◇박성철> 교회를 건축하고 보니까 이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가득 찼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기도 제목이고요. 무엇보다도 오라동 사평, 연미에 있는 분들이 이 교회를 많이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았으면 합니다.
 
또 우리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잘 살아가고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는 열려 있는 교회입니다. 항상 열려 있으니까 누구든지 지나가다가 들려서 차 한잔 하고 또 물 한 잔 마시고 가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지역에 믿지 않은 사람들이 정말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울타리도 없이 지었는데, 누구나 오고 가면서 들릴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소원을 기도하는 집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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