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주도 4·3역사관 한계…"유족·전문가 함께 고민해야"

행정 주도 4·3역사관 한계…"유족·전문가 함께 고민해야"

[4·3역사관, 이대로 괜찮나➂]
예비검속 사건 담은 백조일손 역사관
당초 행정 주도로 지어졌다가 '부실'
유족들, 전문가 섭외해 재구성 거쳐
"역사관 건립, 유족·전문가 협의 많아야"
종합적인 지역 역사관 설립계획 필요

70여 년 전 제주4·3 당시 수많은 사람이 군경의 총칼 앞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주 땅 곳곳이 저마다 다른 사연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습니다. 그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4·3평화기념관을 중심으로 도내 4곳에 4·3역사념관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지역 역사관의 경우 부정확한 자료를 게시하거나 그 지역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제주CBS는 3차례에 걸쳐 지역 역사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을 모색합니다. [편집자 주]
 
예비검속 백조일손 역사관 전시실. 고상현 기자예비검속 백조일손 역사관 전시실. 고상현 기자 
'백조일손 유족들의 끈질긴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지난 8일 서귀포시 대정읍 예비검속 백조일손 역사관. 한 관람객이 붙인 쪽지 내용이다. 백조일손 역사관은 행정이 주도한 '중문 4·3기념관'과 '주정공장 수용소 4·3역사관'과 달리 유족과 전문가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다른 역사관과 비교해 내용이나 구성이 짜임새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양한 역사 자료와 유물 전시
 
'132명의 조상이 한날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켜 하나가 됐으니 후손들 모두 한 자손'이라는 뜻의 백조일손. 한국전쟁 발발 직후 200여 명이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섯알오름에서 총살당해 암매장됐다. 감시 탓에 수년이 지나서야 유족이 유해 132구를 수습해 백조일손묘지를 조성했다.
 
지난해 8월 문을 연 1층 규모의 역사관은 백조일손 묘역 바로 옆에 있다. 전시관 입구에서 4·3과 한국전쟁, 예비검속에 대한 간략한 설명 이후 제주의 예비검속과 섯알오름 집단학살 사건, 백조일손 유족의 진상규명 노력 등에 대해서 각종 역사 자료와 유물을 통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중문 4·3기념관과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이 장소에 얽힌 역사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반면, 백조일손 역사관은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심도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섯알오름 학살현장서 발굴된 탄피들. 고상현 기자섯알오름 학살현장서 발굴된 탄피들. 고상현 기자역사관에는 섯알오름 학살사건 유해 발굴 당시 현장에서 나온 신발창과 총알구멍이 난 옷, 탄피 등의 유물뿐만 아니라 목격자 증언 영상, 희생자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도 전시됐다. 본 기념관인 4·3평화기념관에서는 볼 수 없는 지역 사건에 얽힌 다양한 자료와 유물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백조일손 역사관 관리인 강태식(58)씨는 "개관식 이후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이 많이 찾고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올레길을 걷다가 인근 섯알오름 학살 터를 보고 자세히 알고 싶어서 오기도 한다. 다른 지역 4·3역사관보다는 전시 내용이 알차게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개관 미루며…유족이 만든 역사관
 
지금의 백조일손 역사관이 세워지기까지 유족들의 노력이 컸다. 현재 역사관에 전시된 역사자료는 고(故) 이도영 박사 등 유가족들이 4·3이 금기시되던 군사정권 시기부터 모은 자료다.
 
특히 역사관을 짓도록 제주도에 부지를 기부체납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주도 주도로 2022년 지금 자리에 조성한 역사관은 실망스러웠다. 최근 들어선 중문 기념관과 주정공장 역사관처럼 4·3을 개괄적으로만 다룰 뿐 장소에 얽힌 역사는 빠진 것이다. 역사 자료와 유물 전시도 없었다.
 
이에 반발한 유족들은 역사관 개관을 미루고 전시 내용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도록 했다. 유족들은 직접 4·3과 전시 분야 전문가를 섭외해 수시로 회의를 열며 지난해까지 1년 넘도록 전시 내용과 구성을 논의했다. 유족들의 노력 끝에 장소성과 역사성이 담긴 역사관이 들어설 수 있었다.
 
제주 예비검속 백조일손 역사관. 고상현 기자제주 예비검속 백조일손 역사관. 고상현 기자고영우 백조일손유족회장은 "처음 제주도에서 용역을 주고 만든 역사관 전시실을 보면 형편없었다. 이렇게 만들면 안 될 거 같아서 전문가들을 직접 섭외했다. 회의하기 위해 만나면 식당에서 밥 먹을 시간조차 없어서 도시락 먹으면서 새벽까지 전시 내용과 구성을 논의했다"고 기억했다.
 
"우리가 오랜 세월 모아온 역사자료는 4·3평화기념관에 모두 전시할 수 없다. 후손들과 국민들이 섯알오름 학살사건과 백조일손 묘역이 생긴 과정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알려면 우리만의 역사관이 필요했다. 그 아픈 역사를 제대로 기억해야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행정 주도로 역사관 만들면 망가져"
 
전문가들은 "행정 주도로 역사관을 만들면 망가진다"고 입을 모은다. 보통 역사관 설계부터 공사까지 입찰 공고를 통해 외부업체와 계약을 맺고 추진하게 된다. 전문가가 속한 유적관리위원회 자문을 거친다지만, 그 구성원이 4·3 또는 전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인 경우도 있다.
 
업체의 전시설계 용역 결과물이 나오면 전문가 자문을 거친다고 해도 큰 틀에서는 바꿀 수도 없다. 백조일손 유족처럼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 문제가 있어도 그대로 넘어가는 것이다.
 
유족이 발굴한 경찰문건 전시 모습. 고상현 기자유족이 발굴한 경찰문건 전시 모습. 고상현 기자동아시아 평화기념공원을 연구한 한신대 김민환 교수는 "지역 역사관에 고유한 이야기를 담아내려면 유족과 전문가가 모여 어떤 이야기를 하고 전시는 어떻게 할지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방향이 정해지면, 그때서야 이를 제대로 구현할 업체에 공사를 맡겨야 한다"고 했다.
 
"행정은 실적 좋은 업체에 공사를 맡기고 요식행위로 자문 거치고 끝내면 그만이지만, 평범하거나 부실한 결과물이 나올 뿐이다. 유족과 전문가가 모여 전시 방향을 정한 뒤 업체에 공사를 맡기고, 공사 과정에도 유족 또는 전문가 등이 참여해 제대로 구현되는지 감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 4·3역사관에 대한 제주도의 종합적인 계획도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주 곳곳이 학살 터인데, 어느 지역에 어떤 내용의 역사관을 지을지 체계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특정 지역 유족들이 요구하면 그곳에 역사관을 조성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4·3연구자는 "모든 지역에 역사관을 지을 수는 없다. 여기에 짓는다면 왜 이곳인지 전시내용에 잘 드러나야 한다. 유적지가 제대로 보존돼있지 않으면 기념관을 통해 역사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제주도에서 종합적인 계획을 세워서 역사관을 지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백조일손 역사관 관람객 쪽지. 고상현 기자백조일손 역사관 관람객 쪽지. 고상현 기자

추천기사

스페셜 그룹

제주 많이본 뉴스

중앙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