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손씨 족보에 나온 손순호 하사. 김영범 교수 제공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과 비교해 볼 때 그의 작전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릇된 결과로 사태가 벌어졌다."
제주4·3 당시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손순호 하사가 1948년 8월 12일 통위부(미군정기 국방·경비 전담기구) 군기대사령부에서 열린 고등군법회의 결심공판에서 한 최후진술이다. 김익령 중령은 평화적으로 4·3을 해결하려 했지만, 후임 박진경 대령은 초토화 작전을 지시했다.
그 이후 4·3은 당시 제주 인구(28만 명) 10%인 3만여 명이 무고하게 희생되는 등 무지비한 학살로 이어졌다. 가옥 4만여 채가 불에 탔으며, 중산간 마을 300여 곳은 폐허로 변했다.
손 하사는 법정에서 "(박 대령 지시 이후) 화북에 갔을 때 아버지 시체를 껴안은 15세가량 되는 아이를 살해한 것을 봤다. 사격연습을 한다면서 부락의 가축을 난사했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다"고 당당히 밝혔다.
무자비한 학살 작전이 시작되자 손 하사는 1948년 6월 18일 새벽 숙소로 들어가 박진경 대령을 암살했다. 이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9월 28일 서울 모처에서 총살당했다.
손순호 하사 생가 스케치 모습. 김영범 교수 제공4·3 의인이지만 손순호 하사는 그간 '손선호'로 알려졌다. 최근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가 우연히 만난 손 하사의 5촌 조카 얘기를 들으면서 손 하사의 실명이 '선호'가 아니라 '순호'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 교수는 직접 '경주 손씨' 족보를 확보해 확인해 봐도 손 하사의 이름은 순호였다.
특히 손 하사의 출신지는 경북 경주시 강동면 오금2리로 처음 확인됐다. 김 교수는 손 하사의 후손들을 직접 만나 손 하사가 살았던 생가의 원래 모습도 스케치로 재현하기도 했다.
다만 총살형 집행 이후 손순호 하사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헛묘'는 고향 앞산의 녹방골에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숲이 너무 우거져 진입하기 어렵고 묘의 정확한 위치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유실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3연구소 전 이사장인 김영범 교수는 "4·3의 가장 큰 측면 중 하나가 도민 학살이다. 그 희생을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애썼던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손순호 하사다. 도민의 무고한 희생을 최소화하려 했던 의인이기에 특히 이 분을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